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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챠일드 하쌈

JamieLP 2019. 2. 8. 04:15
<챠일드  하쌈  Frederick Childe Hassam:1859–1935>

제라늄.  1888.  (파리 살롱 출품)

▪미국 인상주의 화가.  메리 카사트와 죤 헨리 Twachtman과 함께 미국의 수집가, 딜러, 뮤지엄에 인상주의를 보급하는데 선구자였다. 오일, 수채화, 에칭 등  3천점도 넘는 작품을 남겼고, 20세기 미국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녁별

셀리아 쌕스터의 정원.  1890

▪하쌈은 뉴잉글랜드 초기 정착민의 오랜 가문에 태어났다.  부친은 보스톤의 성공한 사업가였고, 모친은 미국소설가 나다니엘 호쏜과 같은 집안이다.  하쌈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두덩이 두꺼워 중동사람처럼 보였는데 하쌈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도리어 그림의 싸인옆에 회교도식 초생달을 그려넣기도 하고, 뮬리(워싱톤 어빙 소설 '알함브라 이야기'에 나오는 그라나다의 통치자)라는 아랍식 별명도 가졌다.

하쌈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였다.  1872년 보스톤에 대화재가 나서 부친의 사업이 망했는데, 17세의 하쌈은 하버드에 학비를 대주겠다는 친척의 권유를 거절하고 출판사의 회계부에서 일했다.  당시 목판화기술을 배워 그 계통의 직업을 얻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수채화를, 특히 야외에서 그리는, 좋아했다.

▪1883년 24세의 하쌈은 첫번째 수채화 전시를 보스톤에서 했고,  프레드릭을 뺀 챠일드 하쌈을 화가명으로 사용했다.  그 해 하쌈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등을 여행하며 대가의 그림을 공부했다.  특히 터너의 수채화는 하쌈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건장하고 사교적이며 자신을 조롱하는 농담도 잘 하는 배려있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논쟁적이고 자심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설도 잘 했다. 하쌈은 특히 모리스 헌트의 바비종파의 자연에서 직접 그리는 태도에 영향을 받았다.  한 비평가는 하쌈의 초창기 유화 "뒷길(아래)를 보고 "프랑스학파에 기반을 둔 보스톤 학파의 풍경화에 대한 취향은 생기있고 긍정적인 느낌의  뛰어난 것으로...남성적 건강미와 근육질적인 특성을 지닌 새로운 학파의 시적 감성의 그림이다."라 평했다.

뒷길.  1884.  브룩클린 뮤지엄

비오는 날, 보스톤.  1885

▪하쌈은 프랑스 아카데미 대가인 쟝-레옹 제롬의 미국화가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인 진보적 화가들과 함께 했다.  자신의 전통적 주제로부터 개종한 제롬은 "너의 주변에서 보이는 것을 그려라.  에콜데보자르나 모델은 잊고, 너를 둘러싼 격렬한 삶을 그리고, 브룩클린 브리지가 로마의 콜로세움만큼 가치있고 근대적인 미국이 고대의 유적만큼 멋지다는 것을 확신하라."고 충고했다.

하쌈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번 돈으로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수학한다.  그곳에서 전통적 기법을 공부하면서도 그것이 개성의 몰살이라 느낀 하쌈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파리 초기에 그가 그린 갈색톤의 거리 그림은 보스톤에서 잘 팔려서 그의 생계는 안정되었다.  1887년 색감을 바꾼 "Grand Prix Day(아래)"는 자유롭고 부드러운 붓 터치에 프랑스 인상파의 다야한 색조를 띤 빛이 가득한 새로운 화풍이었다.  직접 교류하지는 않았으나 전시회 등에서 하쌈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종래에는 하쌈은 보스톤의 "십인그룹"에 속하게 된다.  1889년 파리국제박람회에서 하쌈은 동메달을 탔는데, 당시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되 프랑스의 전통을 답습하지는 않는 미국 화가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랑프리 데이.  1887

▪프랑스 인상파화가에 대해 하쌈이 쓰기를, "모네, 시슬리, 피사로와 극단적 인상파화가들은 매우 매력있는 작업을 했고 그것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하쌈 자신도 후에 "극단적 인상파화가"로 여겨지게 된다. 하쌈은 인상파화가와 직접 교류한 적은 없고 르느와르가 쓰던 스튜디오를 그가 빌렸을때 거기 남은 오일 스케치 등을 접했다. "나는 전혀 르느와르를 몰랐지만, 그가 남긴 순수한 색의 실험을 보니, 그게 바로 나 자신이 하려는 작업임을 보았다."

워싱톤 아치, 봄.  1890

하쌈은 빈민가를 멀리하고 뉴욕 5번가 주변에서 보이는 상류사회의 분위기, 신사복과 탑햇을 쓴 신사, 멋진 드레스를 입고 산책하는 숙녀와 아이드, 마차 등을 즐겨 그렸다.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다.  파리에도 5번가같은 멋진 거리는 없다...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의 나라의 미를 알지 못 한다."  하쌈의 주된 관심사는 "움직임 속의 인간"이었다. 

겨울의 5th 애버뉴

▪1889년 미국에 돌아온 하쌈은 뉴욕 5번가에 스튜디오를 열고 뉴욕의 시가지를 즐겨 그렸다. 위의 "겨울의 5th 애버뉴"는 프랑스 인상주의화가들이 사용하지 않을 검정색과 갈색을 교묘히 섞은 그림으로 르피가로지가 "미국적 특성"이 담겼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같은 해의 "워싱톤 아치(위)"는  모네가 그렸음직한 밝은 파스텔조이다.

▪미국과 지베르니를 오가던 씨어도어 로빈슨을 통해 하쌈, J. Alden Weir, John Henry Twachtman는 모네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이들 4인은 미국 인상주의를 대표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사실인 그림들, 친숙하고 가까운 주제를 가능하면 외광에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살리며 때론 과장된 색채로 강한 인상을 남기도록 작품을 그렸다.  도시 풍경화의 경우, 모든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그대로 담기가 불가능했다. 하쌈은 적절한 장소에서 스케치를 해갖고 스튜디오에서 전체를 완성했다.

▪1897년 하쌈은 미국 인상주의화가들의 모임인 "The Ten 십인그룹"에 참여한다.  하쌈은 자신의 작품을 갤러리나 뮤지엄을 통해 마켓팅하여,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제사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00년대에, 프랑스 인상파화가의 전시 39년만에, 미국에서 인상주의가 인정받고 하쌈의 그림은 여러 뮤지엄에 팔리며 상도 받고, 그의 비젼은 인정받았다.  1906년 National Academy of Design의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산업화로 도시의 모습이 바뀌자 하쌈의 도시풍경화에 대한 관심도 시들어갔다.  그는 야외에서의 누드같은 신고전주의적 주제를 찾았다. 그는 겨울에만 뉴욕에서 지내고   오레곤주에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는데 항상  인상주의 혈통을 고수했다. 1909년경 하쌈은 작품당 6천불을 받을 정도로 성공했다.  이즈음 하쌈은 " 창문"시리즈를 그리게 되어 1920년까지 계속된다. 아래의 The Goldfish Window (1916)가 그 예이다

금붕어 창문.  1916

▪하쌈은 1919년 뉴욕 이스트햄톤에 집을 장만했고 주변의 경치나 마을을 그렸다. 1차대전후 그림 마켓은 회복되어 그의 그림도 고가로 팔렸는데 일부에선 그가 반복적인 주제로 그린다는 비평도 있긴 했다.  당시는 미국미술이 애쉬칸학파의 사실주의로 넘어가며, 로버트 헨리나 에드워드 호퍼 등이 알려지던 시기였다.  1920년 하쌈은 평생의 공로로 펜실베니아 예술아카데미에서 주는 금메달을 받았다. 

하쌈은 노년에 큐비즘, 초현실주의 및 아방가르드 운동을 "얼간이 미술 art boobys"라 매도했다.  그는 1935년 75세로 사망했는데, 1960년 미국에 인상주의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하쌈은 "버림받은 천재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  1970년  프랑스 인상파 그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하쌈을 비롯한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도 가격이 올랐다.  (글, 그림 출처는 Wiki)

안트워프의 뒷뜰.  1883.  수채화

카페에서.  1887.  파스텔

Alter and shrine(셀리아 텍스터의 거실), 1892.  수채화

거리에서의 대화.  1892

겨울날 늦은 오후, 뉴욕.  1900

여름 햇살.  1892

센트럴파크.  1892

아이들.  1897

즉흥곡.  1899

초저녁, 유니온 스퀘어.  1902

목욕하는 사람들.  1903

벽돌공.  1905

중국 상인.  1909

금붕어 어항.  1912.  오일

클라리사.  1912

포치의 소파.  Cos Cob.  1914

뉴버그의 비콘 산.  1916

연못정원.  1909

스페인 론다의 성당.  1910.

이스트햄톤, 롱아일랜드, 뉴욕.  1919

콜로니얼 퀼트.  1922.  오일.

▪성조기 시리즈: 
하쌈은 후기에 "성조기 시리즈"를 그려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는 그가 뉴욕 5번가에서 열렸던 퍼레이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수천명이  12시간도 넘게 벌렸던 장면들을 그린 것이다.  영국인 후손으로 반독정서였던 하쌈은 전쟁 기록자로 자원할 정도로 열렬한 전쟁 지원파였다.  하쌈은 성조기가 전면에 크게 강조된 그림을 그려 애국심을 고양했고, 그 작품들은 현재 미국 유명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동맹국의 날, 5월.  1917

대행진.  1917

빗 속의 애버뉴.  1917(백악관 소장)

이 그림은 케네디 시절부터 백악관에 소장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 벽에 이 작품을 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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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 애버뉴.  1918

동맹국 애버뉴.  벨기에.  1918.  오일

동맹국 애버뉴.  영국.  1918.  오일

햇살에 기대어.  1910

밤의 택시정류장, 뉴욕 매디슨 광장.  1891

Gorge, 애플도어.  1912.  수채화

몬톡.  1921

빅토리아시대의 의자.  1906

사월(초록가운).  1920

과일가게

알함브라궁.  1883

헛간 뜰

여름저녁

파리 그랑프리에서.

캔터베리

하쌈부인과 그녀의 여형제

황혼의 산책, 파리

꽃파는 여인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