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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쟌 슬로운

JamieLP 2019. 2. 9. 05:34
<쟌 슬로운 John French Sloan:1871–1951>

▪미국 화가이자 에칭작가. 애쉬캔학파 창시자이자 8인회 멤버.  뉴욕의 삶, 끈질긴 에너지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20세기 초 사회주의 원칙을 받아들여 그 믿음에 맞는 예술의 재능을 펼친 사실주의 화가"이다.

슬로운은 펜실베니아 태생으로 1904년 뉴욕으로 갈 때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장려받았다.  13세에 유서깊은 센트랄하이스쿨에 입학했을 때 윌리엄 글라켄스가 같이 다녔다.  부친의 정신병발발로 16세의 슬로운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책방에서 일하며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고, 특히 거기서 파는 인쇄작품을 보고 듀러나 렘브란트의 작품을 펜화로 그린 초기 작품이 남아있다.  슬로운은 에칭작업(카드, 달력 등)을 해서 돈을 벌며, 밤에는 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21세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삽화가로 일하며,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에 입학해서 토마스 안슈츠(사실주의화가)의 지도를 받는다.  여기서 글라켄스도 다시 만난다.
자화상.  1890

 
자화상

▪1892년, 슬로운은 재능있는 화가이자 예술의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났다.  헨라이의 스튜디오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휘트만이나 에머슨의 글을 읽기도 하고 영향을 받으며, 헨라이는 슬로운의 멘토이자 친한 친구가 된다.  예술적 견해가 같았던 두 화가는 훗날 애쉬칸학파라는 새로운 길을 찾게된다.  1895년 슬로운은 필라델피아 프레스의 예술부로 직장을 옮기고 그림에 정진한다.  헨라이는 그에게 유럽 그림, 마네, 벨라스케스, 고야, 할스 등의 인쇄그림을 보내주며 격려했다. 

▪슬로운은 돌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낮에는 백화점 직원, 밤에는 매춘녀.  슬로운은 고민을 이겨내고 1901년 그녀와 결혼했다.  돌리는 슬로운을 믿고 사랑하는 동반자로 큰 힘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알콜리즘에 정서불안으로 결혼생활의 위기도 많았다.  뉴욕 시기에 그 부부의 위기를 달래준 사람은 죤 버틀러 예이츠(영국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부친)이었다 한다. 

매디슨 광장의 물을 뿜는 분수대.  1907

그림 가게 창문.  1907

▪뉴욕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주한 슬로운은 "맥솔리 바", "6th 애버뉴 3가에서 고가철도" 및 "페리가 지나간 자국"(아래의 3작품)등 잘 알려진작품을 그렸다.  당시 활발한 작품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별로 팔리지 않아 신문사나 책에 프리랜서 삽화가로 일해 생활비를 보탰다.  슬로운은1908년 기념비적인 맥베스갤러리 전시에 참여했고, 이는 "8인회"라는 그룹이 되어 함께 순회 전시를 하고 이름을 알리게 된다.

맥솔리 바, 1912

6th 애버뉴 3가에서의 고가철도.

페리가 지나간 자국.  Wake of the ferry.

▪슬로운 부인의 술중독 문제를 치료하던 의사는 슬로운에게 매일 일기를 써서 남편의 애정을 불안해하는 그녀를 돕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1906-1913년까지 쓴 일기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슬로운의 관심, 활동 및 전후 시대의 사회상을 담은 중요한 자료로서, 1965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슬로운은 자신이 "금권정치"라 부르는 정부에 불만을 품고 1910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지인 The Masses의 예술 에디터로 있으며 반전, 반자본주의 그림을 기고했다.  그러나 정치선동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고 독트린화되는 것에 반대하여 그 잡지를 떠난다.  그는 평생 정치적으로 좌파임을 밝혀 미국 경제의 불평등을 반대하고,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참여도 반대했다.

1913년 슬로운은 아모리 쇼의 준비위원이었고, 자신의 작품도 전시했다.  이때 유럽 모더니스트의 그림을 보고 슬로운은 점차 사실주의적 도시 그림에서 외광의 풍경화로 바뀌어 고흐나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신선하고 다양한 색채의 부드러운 화풍으로 변해갔다(글루스터에서의 풍경화).  1914년부터 아트 스튜던트 리그 교수가 되어 18년간 일했다. 학생들은 실용적인 지식과 진실성을 갖춘 그를 존경했다.  그 자신이 그림을 많이 팔지 못한 화가이기도 했지만, 그는 예술의 상업주의를 경멸했고, 창조의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찾으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918 여름을 마지막으로 글루스터에서 보내고 슬로운은 향후 30년 매여름 4개월을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지냈다.  사막은 그에게 형태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디언 예술에 강한 흥미를 갖는다.  슬로운은 1920년 "미 대륙에서 고전 대가의 반열에 선" 멕시코 화가 리베라의 최초 미국전시회를 여는데 앞장섰다. 

1943년 부인이 사망했고, 슬로운은 40살 연하의 제자와 재혼했다.  1951년 슬로운은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은 그의 소장작품을 전국의 뮤지엄에 골고루 기증했다.(글 출처.  Wiki)

그린의 고양이.  1900

먼지 폭풍.  5th 애버뉴.  1906

석양, W 23가.  1906

부활절 이브.  1907

선거일 밤.  1907

미용사의 창.  1907

▪도시의 미용사, 점원, 행인들을 즐겨 그린 슬로운은 애쉬캔학파에 가장 잘 맞는 화가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 용어(애쉬캔)를 싫어했다.  그는 그 용어가 다양한 화가들을 균질화시켜 관람자가 회화의 스타일보다는 내용에만 관심이 가게 만든다 생각했다. 그는 화가는 붓질, 구도, 색감이 감상되어져야 한다고 여겼는데, 아닌게 아니라 현대에 와서 애쉬캔학파의 그림은 그 도큐적인 특질과 중요성에 촛점을 맞추어 감상되는 일이 흔하다.

▪슬로운은 헨라이나 글라켄스에 비해 매우 작업속도가 느렸다.  그는 사물을 보고 기억해서(때로는 글로) 그렸기에 인식적이라기 보다 개념적이었다.  그는 도시민들의 삶을 관찰하는 습성이 있었다.  (호퍼처럼) 슬로운도 강한 집중을 위해 창문의 전망을 이용했다.  "나는 창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지켜본다는 것이 들키지 않게...대상인 사람들에게 무례함이 되지 않도록 그들이 안 보게끔."  그의 이런 태도는 그가 즐겼던 할리우드 영화나 실존주의 소설에서의 나레이션 테크닉을 상기시킨다.

영화, 5센트.  1907

침대.  1907

헤이 마켓.  1907

피크닉 장소.  1906-7

시골길.  1908

펜실베니아, 포트 워싱톤, 우리 집.  1908

남쪽 바다 해수욕객.  1908

중국 식당.  1909

분장하는 광대.  1909

스페인소녀(모피모자와 붉은 코트).  1909

새벽 3시.  1909

비둘기.  1910

Petitpas에서의 예이츠.  1910

5th 애버뉴, 뉴욕.  1911

바닥 닦는 여인, 아스토 도서관.  1911

▪슬로운의 열렬한 사회주의 사상이 그림에 반영되는 것에 관해 그는 "그림을 연민으로 그리지 사회적 의식으로 그리지 않는다...그림에 선동성을 담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그림의 주제로 도시민들의 삶, 기쁨을 담을 뿐이어서, 사가들이 내 그림에서 사회주의 의식을 해석하려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길가의 창.  1912

여자의 일.  1912

Renganeschi의 토요일 밤.  1912

봄, 그래머시 파크.  1912

일요일, 머리 말리는 여인들.  1912

로제트.  1913

봄에 씨뿌리기, 그리니치 빌리지.  1913

뒷 마당, 그리니치 빌리지.  1914

풀덮인 모래언덕, Gloucester.  1914

유머레스크.  1915

지붕위의 태양과 바람.  1915

글루스터 Gloucester 항구.  1916

푸른옷을 입은 화가의 아내.  1916

샐리와 폴, 적색과 녹색.  1918

거리, 라일락, 자정의 태양.  1918

코넬리아 스트리트.  1920

햇빛 비추이는 정상, 산타페 캐뇬.  1920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본 도심.  1922

타작마당, 염소.  1924

오렌지를 든 누드, 푸른 소파.  1925

▪1920년말, 드디어 슬로운의 도시 그림에 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테크닉을 바꾸고, 주제도 도시민의 일상에서 누드나 초상화로 전격 바꾸었다. 이런 독자적인 태도는 슬로운다운 것으로, 그의 미술 딜러는 크게 실망한다.  페인칭 테크닉도 마네나 헨라이에서 과거의 대가 만테냐처럼 밑칠을 하고 번쩍이는 방식을 택하는 괴팍한 선택을 했다.  이런 새로운 방식의 그림은 애쉬캔 시절의 그림보다 인기가 없었다.

챠마, 뉴멕시코의 붉은 길, 1925

피아노 앞 누드.  1928

봄, 워싱톤 스퀘어.  1928

젖은 밤, 워싱톤 스퀘어.  1928

맥솔리 바의 고양이.  1929

후아니타.  1930

녹색과 적색.  1938(크레용)

자화상.  1946-47(템페라)

광장의 기념비, 뉴욕.  1949

산타페 시에스타.  1948-49(템페라에 오버글레이즈)

붉은 손거울의 누드.  1950